[Books&Biz] "망해가는 은행 누가사나"…20년전 제일은행 매각 그 씁쓸했던 기억
기사입력 2021.01.27. 오후 8:27 최종수정 2021.01.28. 오전 9:15
Money Games Out of the Gobi / 웨이지안 샨
"최악의 경제위기 가운데, 망해가는 나라의 망해가는 은행을 누가 사겠나."
1998년 9월 뉴욕. 당시 미국계 사모펀드 뉴브리지캐피털의 웨이지안 샨 파트너(현 PAG캐피털 회장)는 투자은행 모건스탠리가 보낸 티저(투자안내서)를 읽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티저에는 "한국 정부가 제일은행과 서울은행 지분의 최소 50.1%를 해외에 매각하려고 한다. 이들 은행의 부실 여신은 전체 여신의 25%에 달하며, 부실자산에 대한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간략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샨은 단번에 투자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은행 인수·합병(M&A) 경험이 있는 데이비드 본더먼 당시 텍사스퍼시픽그룹(TPG) 회장이자 뉴브리지캐피털 공동 회장 생각은 달랐다. 본더먼 회장은 티저를 검토해본 후 샨에게 팩스를 보냈다. "한국 정부의 지원이 훨씬 늘어나야 한다는 점은 투자 기회다. 다시 말해 정부가 보전하는 망해가는 은행을 바닥에서 살 수만 있다면 대박 투자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 해외 자본의 은행 인수, 뉴브리지캐피털의 제일은행(현 SC제일은행) 인수는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해 10월 샨이 출간한 'Money Games'는 아시아 금융위기의 한가운데서 우리나라 최대 은행 중 하나였던 제일은행이 어떻게 해외에 매각됐는지 그 과정을 다뤘다.
사실 기자가 제일은행을 취재하던 2000년대 초반 샨은 좀처럼 만나기 힘든 취재원이었다. 당시 제일은행 최대주주였던 뉴브리지캐피털은 제일은행 인수로 막대한 이익을 낸 후에 새로운 주인 찾기에 돌입한 상태였다. 또 사모펀드에 팔 것인지 아니면 은행에 팔 것인지, 외국계 금융기관이 아니라 국내 금융기관에 재매각할 생각은 없는지 등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기자들은 번번이 그를 놓쳤다.
그런 샨을 책으로 만난 건 2년 전이었다. 'Money Games'에 앞서 'Out of the Gobi'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이 걸작이었다. 중국 베이징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샨은 초등학교 졸업 후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가 12세였던 1966년,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고비사막으로 끌려가 10년간 강제노역을 했다. 이후 중국 덩샤오핑 주석의 개혁개방이 시작됐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로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도미한 샨은 장학금을 받고 버클리대 경제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당시 그를 지도했던 교수 중 하나가 재닛 옐런 현 미국 재무부 장관이다. 옐런 장관은 이 책 추천사에서 샨의 첫인상을 흥미롭게 묘사했다. 1982년 샨을 만났는데, 좋은 음식과 미용사가 필요해 보였다고. 옐런 장관은 수학 정규교육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샨이 촛불을 켜고 공부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 부지런함에 우수함까지 겸비한 샨은 졸업 후 세계은행에서 잠시 일하다가 펜실베이니아대 와튼경영대학원과 MIT 모두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았다. 와튼에서 잠시 교수 생활을 하던 그는 1993년 학계를 떠나 금융권에 투신한다. JP모건에서 투자은행가 생활을 5년 한 후에 1998년 사모펀드 뉴브리지캐피털로 옮긴 그는 제일은행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다시 'Money Games'로 돌아가보자. 1998년 10월 샨과 본더먼 회장은 제일은행 인수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해 서울을 처음 방문한다. 그때 이들을 만난 이가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다. 샨은 이 위원장은 처음부터 매우 신중하게 접근했다고 묘사한다. 그들이 이 위원장에게서 받은 첫 질문은 "제일은행이 한국에서 가장 큰 은행 중 하나인데 자본은 충분한가"였다. 샨은 고민 없이 "돈은 문제가 안 된다"고 답한다. 이렇게 시작된 제일은행 M&A는 그로부터 1년간 우리 정부와 뉴브리지캐피털 간에 33차례에 걸친 협상전을 거친 후 2000년 초에야 실제 투자금이 들어왔다.
지루한 협상 과정을 읽는 동안 샨이 20년 전에 지나간 제일은행 딜에 대해 책 한 권을 쓸 정도였는가에 대해 생각해봤다. 사실 그동안 사모펀드 업계의 전설적인 딜이 책으로 나온 게 몇 권 있었다. 베스트셀러로 국내 번역본도 출간된 '문 앞의 야만인들'은 미국 최대 사모펀드 KKR의 RJR 나비스코 딜을 다루었고, 'Dethroning the King'은 브라질 사모펀드 3G의 세계 최대 맥주 회사 앤하이저부시 딜을 다뤘다. 하지만 샨은 이런 책들이 딜 직후에 쓰인 터라 장기적으로 어떤 가치를 남겼는지를 전혀 알려주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당시엔 성공적인 딜일지라도 후에는 실패로 기록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제일은행 딜은 20년 전 헐값 매각, 혈세 유출 논란이 많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당시 우리 정부나 사모펀드 양쪽 모두에 최선의 딜이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샨이 남긴 전설적인 딜이 제일은행만이 아님을 상기할 때 앞으로도 이런 책이 더 나오지 않을지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한예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