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에너지] 전기차 시장 패권 경쟁, 광물 공급망 확보에 '성패' 갈린다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19.05.08 14:39 수정 2019.05.12 10:23:42
[에너지경제신문 박성준 기자] 전 세계적으로 전기차 판매량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로 꼽히는 니켈, 구리, 리튬 등 주요 광물들의 공급 부족 사태가 심각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로 인해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전기차 시장에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자국 내 광산산업에 대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단행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평가다.
8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전기차 생산업체 테슬라의 사라 메리셀 글로벌 금속공급 매니저는 최근 워싱턴DC에서 열린 비공개 산업 컨퍼런스에서 "광산업에 대한 투자가 감소하면서 니켈, 구리 등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소재로 꼽히는 광물들이 전 세계적으로 공급 부족 현상을 맞이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 "전기차 판매량이 성장세를 보일 경우 광물들의 공급 부족 현상은 더 빨라지게 되고, 이로 인해 주요 원료들의 가격이 급등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해당 컨퍼런스에는 국무부와 에너지부 관계자스탠더드리튬, 아이오니어 등의 광산업체 관계자를 포함해 100여명이 참석했다.
테슬라가 광산산업에 대한 시황과 전망에 대해 업계 관계자들과 의견을 공유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만큼 테슬라가 광물 공급부족 사태를 심각하게 보는 것 아니냐는 진단이 나온다.
이렇듯 주요 광물들이 전기차 배터리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광산업체들이 투자를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구리산업은 수년간 과소투자로 인해 어려움을 겪어왔다. 세계 최대 구리 생산업체인 프리포트 맥모란은 미국과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사업장 확장에 나섰지만, 전기차 배터리 수요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전기차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내연기관차보다 구리가 두 배 가량 더 필요하다. 그러나 자동차를 제외한 다른 산업에서도 광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공급 부족 사태로 인한 가격 급등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테슬라 역시 이 점을 가장 크게 우려하고 있다. 실제 컨설팅회사 BSRIA에 따르면, 알파벳과 아마존의 스마트홈 시스템은 현재 구리를 연간 3만8000톤 소비 중인 것으로 집계됐다. 구리 소비량은 2030년 약 150만톤까지 급증할 전망이다.
신재생에너지가 확산되고 있는 것도 전기차 배터리 산업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전 세계적으로 화석연료 비중을 줄이고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확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전력 변환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트랜지스터가 태양광 패널, 전기차에 동시에 사용되기 때문에 광물 수요가 더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것이다. 블룸버그는 "화석연료를 단계적으로 없애려는 기후 친화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전기차와 태양광 산업이 함께 뭉쳤지만 이들은 동일한 공급체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해당산업에 필요한 첨단부품들을 놓고 전면 경쟁에 나섰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테슬라는 앞으로 배터리 음극재 소재로 쓰이는 코발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니켈을 확보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전 세계 코발트의 약 3분의 2가 콩고민주공화국 남부 지방 루알라바 Lualaba주(잠비아 국경 근처)에서 생산되고 있다. 이는 코발트에 대한 의존도를 계속 낮추겠다는 테슬라의 방침으로 풀이된다.
◇ ‘공급 부족’ 전망 속 원자재 확보에 더딘 美…"전기차 시장의 패권은 中"
그럼에도 메리셀 매니저는 테슬라가 코발트의 의존도를 낮추기보다는 미국이 칠레, 호주, 캐나다 등 주요 광물생산국과 협력하며 전기차 배터리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정부 관계자들에게 촉구했다. 그는 "전기차 산업이 성장하기 위해선 소재공급이 원활해야 하기 때문에 (자국내 광물산업에 대한) 투자가 절실하다"고 밝혔다.
광물 공급이 앞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미국이 자체적으로 광물생산 시설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전기차 시장에서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는 판단이다. 오일프라이스닷컴의 닉 커닝엄 연구원은 2025년 리튬 수요가 현재보다 3배 가량 급증할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은행(World Bank) 역시 리튬, 흑연과 니켈에 대한 수요는 2050년까지 각각 965%, 383%, 108%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원자재 전문가들도 광물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만 미국의 전기차 시장이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뉴욕의 원자재 컨설턴트 회사 하우스 마운틴 파트너스의 크리스 베리 CEO는 "핵심소재에 대한 공급이 원활하지 못할 경우 50만개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양산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광물산업에 대한 미국의 투자가 뒤쳐지면 친환경 에너지를 둘러싼 미국 공급망의 역동성과 경쟁력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진단했다.
실제 중국이 전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자국 내 광산산업에 대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늘렸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는 중국이 미국보다 거의 8배나 많은 리튬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있어 전기차 공급망을 둘러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전 세계 전기차 판매량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판매되고 있고, 전기차 배터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부품도 중국에서 제조되고 있는 점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에 힘입어 아시아권 국가들의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앞으로도 상승세를 탈 것으로 기대된다. 블룸버그 산하 에너지조사기관 BNEF에 따르면 아시아권 국가들은 현재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점유율은 2021년 73% 수준까지 급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미국은 세계 리튬전지 생산능력의 약 13%만 점유하고 있다. BNEF는 앞으로 미국의 전기차 배터리 시장 성장성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는 않고 있다. 광물시장 조사업체 벤치마크 미네랄(Benchmark Minerals)도 세계 리튬이온 배터리의 3분의 2가 중국에서 제조되고 있는 반면 미국의 배터리 생산량은 5% 수준에 불과한다고 진단했다.
테슬라, 폭스바겐 등을 비롯한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은 미국에서 전기차와 관련된 신규투자, 기술개발, 공장증설 등에 나서고 있지만 자국 내 광물산업 투자가 저조하면서 광물 수입에 대한 의존도는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다. 광물가격은 곧 전기차 업체들의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에 전기차 업체들은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급 인프라가 잘 구축된 중국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미국의 리튬 공급업체인 앨버말(Albemarle)의 에릭 노리스 글로벌 리튬사업본부장은 "리튬 정제 시설이 미국에 마지막으로 지어진 이후 수십 년이 지났다"며 "새로운 광산 프로젝트가 진행되기까지는 규제기관의 요구사항, 지역사회에 대한 잠재적인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꽤 걸린다"고 밝혔다.
글로벌 전기차 업체들이 중국 시장에서 판매량을 늘리는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테슬라는 올해 모델 시리즈를 중국 시장에 투입한데 이어 올 연말에는 상하이에 건설 중인 전기차 전용 배터리 공장 ‘기가팩토리3’에서 전기차를 본격적으로 양산할 방침이다. 폭스바겐은 전기차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ID’ 시리즈를 중국에서 선보였다. 포드자동차는 중국에서 앞으로 3년간 출시할 30개 이상의 모델 가운데 3분의 1은 전기차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짐 해켓 포드 최고경영자(CEO)는 "중국은 세계 스마트 차량 시장을 이끌고 있고 이는 포드 비전의 핵심 부분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미국·이탈리아 합작 자동차업체 피아트크라이슬러(FAC)를 포함해 도요타와 혼다, 미쓰비시 등 일본 메이커 등 4개사는 중국 광저우자동차그룹(GAC)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EV를 판매함으로써 중국 시장 진출을 확대할 방침이다.
◇ ‘위기 의식’ 美, 광산관련 산업 규제 간소화 입법 추진…"中 뒤쫓아야"
이로 인해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전기차 시장에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자국 내 광산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것이 관건이라는 평가다. 해당 컨퍼런스에 참석한 미국의 한 상원의원은 위기의식을 느낀 듯 미국 내 새로운 광산개발에 대한 규제를 간소화하는 법안을 새로 제출한다고 발표했다. 에너지 천연자원위원회 의장인 알래스카 공화당 소속 리사 머코우스키 상원의원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웨스트버지니아 민주당 소속 조 맨친 상원의원과 함께 ‘광물 보안법’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해당 법안에는 광물산업에 대한 규제를 축소시키고 리튬, 흑연 등을 비롯한 전기차에 필수적인 광물광산 개발에 대한 요건을 허용하는 내용이 담긴다.
전기차 시장에 대한 패권은 국가 안보와도 직결된다. 머코우스키는 "광물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그 국가가 광물 분야에서 취약하다는 것이다"며 "그러나 우리는 이를 이해하는데 실패했다"고 토로했다. 특히 그는 "중국이 전기차 관련 광물 공급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진행 중인 미중 무역분쟁에서 중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머코우스키는 "지금 나의 가장 큰 과제는 (광물 보안이) 왜 국가적 우선순위가 돼야 하는지 의회 의원들을 교육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광산업체들은 미 연방정부가 전기차 관련 문제에 위기의식을 높이도록 하기 위한 머코우스키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전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중국이 미국보다 앞섰다는 사실에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리튬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있는 ‘피에몬트 리튬 주식회사’의 관계자는 "전기차 시장에서 중국이 미국보다 앞섰다는 사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신경써야 할 국가는 중국 뿐만이 아니다. 앞서 독일과 프랑스는 지난 2일(현지시간) 차세대 전기차용 배터리 개발을 위해 7조원을 공동으로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그간 유럽 국가들은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을 아시아 기업들이 선도하는 데 대해 위기의식을 갖고 공동 대응방안을 모색해왔다. 독일, 프랑스 내 자동차와 에너지 분야의 35개 기업도 이번 프로젝트에 40억 유로(약 5조 2000억원)를 분담할 방침이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마로스 세프코비치 부위원장은 "4∼5년 내로 유럽의 배터리를 생산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다"면서 EU가 12억 유로(1조5600억 원)를 지원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